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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20대라면.

 


  2014학년도 수능이 끝났습니다. 그러고도  스무 날 정도가 흘렀네요. 누군가는 곧 나올 성적표를 고대하고 있을 테고 누군가는 성적표가 나오는 날이 제삿날이라며 울상을 지을 것이 눈에 환하네요. 또 누군가는 벌써 내년을 준비하며 올해 공부한 것들을 복습하고 허탈한 마음을 다잡고 있을 테지요.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힘드셨지요? 제게도 무척이나 힘든 한 해였네요. 구수라는 꼬리표가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았거든요.



  물론 생짜 구수는 아니에요. 27인 올해까지 대학을 여기저기 추수철 메뚜기 마냥 옮겨 다니며 지내 온 시절이 학기로는 8학기, 해로 치면 사 년이 되네요. 그 외의 시간은 재수학원에서 보낸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를 한 번 풀어보고자 합니다. 



  고3 때, 저는 무척 공부를 안 하는 학생이었어요. 보충수업비를 게임방에서 탕진하고 영어학원비는 제가 하고 싶었던 요리학원에 기부했지요. 덕분에 고3 때 인문계 학생으론 드물게 한식조리기능사를 딸 수 있었습니다. 웃기죠, 참. 그러고도 물수능과 좋은 운에 힘입어 06학년도 수능에서 언어와 외국어 영역은 만점을 받을 수 있었지요. 책은 좀 읽는 편이었거든요. 수학은 3등급, 사탐은 재미있게도 1234가 나오더라고요. 



  그 성적을 기반으로 나름 알아준다는 대학에도 붙었지만 결국은 숭실대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저것 참 많이도 주더군요.  사 년 장학금, 기숙사 무료, 방학 포함 일 년 내내 한 달에 40만 원의 용돈까지... 열심히 공부해 내 만들어 낸 점수가 아니었기에 제 점수를 굉장히 하찮게 여겼던 것 같아요. 그냥 용돈 준다니까 대학 서열이고 뭐고 무시하고 그냥 들어갔지요. 



  슬슬 현실을 알게 된 건 대학 3학년을 마칠 때쯤이었습니다. 이야, 세상이 그렇게 험난한 줄은 처음 알았어요. 취업 참 힘들더군요. 그 전까진 학교에서 용돈도 주겠다, 과외로도 꽤 많이 벌겠다, 참 방탕하고 무책임하게 자알도 놀았거든요. 4학년이 되려니 덜컥 무서워지더군요. 



  재미있게도 친구가 재수를 한다기에 따라 가 본 학원에서 저도 재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남들은 4학년이 되는데 전 재수생이 된 거죠. 사실 그건 도망이었어요. 취업이라는 전쟁에 나가기 두려워 다시 신병교육대로 돌아가는 결정이었지요. 하지만 재수학원에서 얻은 것들은 참 값진 것이었습니다. 공부란 게 뭔지 알았거든요. 처음으로 엉덩이를 붙여 몇 시간을 공부해 보고 처음으로 손으로 종이에 무언가를 까맣게 써 보고... 유예된 수험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하고 알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일 년 동안 참 즐겁고 재미있게 공부했습니다. 


 

  근데 그게 문제였을까요, 그렇게 공부를 했는데도 성적은 현역 때와는 별로 다르지 않았어요. 이야, 공부 시간은 백 배, 아니 천 배가 넘게 차이가 났는데 전 제자리더라고요. 그나마 사탐은 올랐는데... 별 의미는 없었죠. 얼마나 참담하던지... 아 내가 수험생 때 공부 안 한 벌을 이렇게 받는구나... 남들 고생할 때 혼자 놀고서도 점수 잘 나온 벌이 이런 건가... 여하튼 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다음 해 2월까지 방황하다 다시 학원으로 돌아갔습니다. 합격 통지가 나온 대학도 있었지만 원래 목표와는 판이하게 다른 그 결과를 받아들이기가 힘들더군요. 그 대학을 원하시는 다음 분들께 양보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수능공부를 시작했죠. 이번엔 저번처럼 즐겁거나 재미있게 하려는 생각을 모두 버리고 한 번 죽어보자는 생각만 머리에 가득했어요. 다른 학생들은 재수 때 할 생각을 전 스물 넷이 돼서나 하게 됐네요. 얼마나 늦고 어리석은 인생인지... 


  근데요, 사람이 순식간에 바뀌면 죽을 징조라잖아요. 저도 그렇더라고요. 정말 중요한 6, 7월을 우울증이 와서 그냥 멍하니 모두 날려 버렸어요. 학원에서 잡아두면 뭐합니까? 앉아서 멍만 때리는데. 그냥 모든 의무가 피하고 싶어지고 공부라는 게 역겨워지는 형태로 우울증이 나타나더라고요. 죽고 싶다는 생각은 없는데 그냥 무기력의 극에 달해 모든 걸 놓아버리게 되더군요.  게다가 학원이 고려대 한복판에 있는 학원이었습니다. 참... 그네들을 보며 자괴감과 열등감에 빠져  헤어 나올 수가 없었어요.  


  더이상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 대학병원 신경정신과에 가서 약을 처방받고 치료를 받고서야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습니다. 수험생활 중 위와 같은 증상이 나타나는 분들은 꼭 정신과 가세요. 그거 우울증입니다. 약빨도 무지 좋아요. 약 먹자마자 스트레스로 찐 살이 쭉쭉 빠지면서 공부 의욕이 연초와 같이 불타오르덥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니 어느새 수능이 다가오고, 시험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2011학년도 수능, 참 불수능이었지요. 다행히도 죽어라 수학을 판 보람이 있는지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수리 90점대의 점수를 수능에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생각나는 답이 있는데요, 주관식이었는데 도무지 안 풀리는 겁니다. 그래서 찍었습니다. 근데 그걸 어찌 찍었냐면 주관식 다른 문제들의 답이 13, 15, 21이었어요. 교수님들은 두 자리 홀수를 좋아하신다죠? 그래서 17, 19 중 고심하다 7이 왠지 행운의 숫자라 교수님들의 함정일 것 같아서 19로 찍었고, 밎췄습니다. 어이 없게도 3번을 틀리긴 했지만요. 살을 내주고 뼈를 친 기분이었지요.


  성적표가 나오니 1만 찍힌 것이 참 예쁘덥니다. 근데 백분위가 참 못났더군요. 잘났다고 까불던 국영에서 처음으로 빨간 줄을 그어 보고 수학도 틀린 두 문제가 얼마나 아쉽던지... 결국 현역 때와 마찬가지로 장학금 받을 만한 곳 위주로 원서를 넣었습니다. 물론 제 나이도 있기에 취업이 어렵지 않은 곳이 최우선 순위였지요. 어머니는 연고대에 미련이 있으셨는지 그리도 연고연고 하셨는데, 전 연고는 상처 난 데나 바르는 거라는 어마어마한 개그를 치며 원서질을 끝냈습니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과 같이 서울교대에 장학생으로 붙을 수 있었습니다. 국립대라 그런지 장학금 참 짜더군요. 제가 수석은 하지 못한지라 기성회비 정도는 내야 했는데, 나이도 나이여서 부모님껜 손 못 벌리고 제가 벌어 다 냈네요. 그때 나이가 스물다섯이었습니다. 군대에 가야 할 나이죠. 다행인지 불행인지 시력이 매우 좋지 않아 공익판정을 받고 서울교대 1학년이 끝나자마자 훈련소에 입소했습니다. 교대는 실습 때문에 다른 학교보다 학기가 이 주 정도 길어 종강 사흘만에 입소를 했네요.



  훈련소에서 나와 공익생활을 하는데, 공익도 공익 나름이겠지만 퇴근 후 시간이 텅 비어 있어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게 참 안타까웠습니다. 현역들은 그 시간이 더 힘들다는데... 현역에 있는 분들께 심심한 존경의 염을 보냅니다. 여하튼 그래서 다들 하는 공무원 공부를 해보고 싶기도 하고 이왕 할 거면 행시를 목표로 해보자는 생각에 행시 일행직렬을 목표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결과는요? 경제와 행정법 두 과목 마치니 시험이더군요. 이 뭐... 일 차는 요행히도 합격했지만 이 차는 시험장에도 안 갔습니다. 이건 뭐 사람이 할 공부가 아니더라고요. 세상엔 참 천재들이 많은가 봅니다. 



  그렇게 일 년을 행시준비로 허송하고 남은 일 년을 어찌 메꿀까 생각하다, 이루지 못한 수능 최상위권의 꿈이 떠올랐습니다. 직전 성적도 상위권이 아닌 건 아니었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남더군요. 이래서 수능을 중독이라고 하나 봅니다. 



  그래서 올 한 해를 수능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이 나이에 공부를 하는데는 돈도 꽤 들기도 하고 부모님께 손을 벌리는 것도 남우세스러워 겸직허가를 받아(공익은 원칙적으로 영리추구행위가 금지되어 있지만 허가를 받는다면 일정 범위내에서는 가능한 '겸직허가'를 내 줍니다.) 예전에 다니던 재수학원에서 퇴근 후와 주말에 질의응답과 생활지도 위주로 수험자금을 조달했습니다. 교학상장이라, 질문을 받아주는 동시에 제 실력도 느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도 장수생이라면 장수생이라 힘든 친구들과 상담도 해 주면서요.



  그렇게 일년여를 지내고, 이번 수능 날이 다가왔습니다.  그동안 부모님께서는 나이를 이리 많이 먹고도, 대학을 남들은 졸업할 만큼 다니고도 또 수능을 치는 불효자를 위해 성당에 가서 54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를 하셨고, 감사하게도 수능 당일엔 도시락을 싸 주시고 시험장까지 데려다 주셨습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말밖엔 할 말이 없더군요.



  시험은 다행히 쉬웠습니다. 수학에서 언제나와 같이 남들 다 맞는 문제인 2번을 틀리고 영어가 조금 어려워 오답이 좀 나왔지만 남들이 쉬운 만큼은 쉬웠던 것 같습니다. 제가 쉬웠으면 남들도 쉬웠겠지만 그거야 수능 날에는 생각도 나지 않는 문제지요.


  그렇게 구 년에 걸친 제 수험생활이 끝을 맺었습니다.

 

  아쉬움은 물론 남지만 N수생이라는 단어에서 N의 자리에 두 자리의 수를 올려놓을 엄두는 도저히 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해 온 것만으로도 제 학창시절의 나태와 무책임에 대한 대가를 충분히 치렀다고 생각하니까요.


  저는 이 글을 저와 비슷한 나이대에 다시 수능을 보신, 혹은 보실 분들이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정말 이 나이대의 재수란 힘들거든요. 재수생활 자체도 힘들지만 주변의 눈길과 친구들보다 많이 뒤쳐져 있다는 생각이 더 자신을 힘들게 합니다. 그런 분들께 그런 사람이 혼자가 아니었음을, 아님을 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야기를 통해 공감하고 싶습니다. 우린 아직 20대잖아요. 아직 젊다고 우길 만큼은 되잖아요?



수험생 여러분, 고생하셨습니다. 
아니, 우리 고생했어요.
그렇지요?

  • ?
    코리메 2013.11.25 20:41
    좀 늦은 나이에 입학하는거지만...미리 ㅋㅋ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의지가 대단한거 같네요.
  • ?
    라힐렌 2013.11.25 21:26
    내일 모레 성적이 나와 봐야 어떻게 될지 확정이 되겠죠. 헤헤헤
    미역국 먹기에는 부정 탈까봐 조금 무섭네요.^^;;
    고생했다고 한 번 쓰다듬어 주세요~ 하고 쓴 글입니다.
  • ?
    코리메 2013.11.25 21:30
    고생많았어요. 진심으로 한번 쓰다듬어 드립니다. ㅋㅋ
  • ?
    라힐렌 2013.11.25 21:37
    시커먼 남자놈이지만 쓰다듬어 주신다면야 사양찮고...(부끄)
  • profile
    스마일빈 2013.11.26 07:31
    잘읽었습니다..ㅎㅎ 오랜시간 여러 경험한 만큼 가 앞으로 헤쳐나가는데 큰 밑거름이 될꺼라 믿습니다^^ 저도 대학을 다니다가 한의대 준비하고 있는...ㅋㅋ 먼저 합격하세용!! 곧이어 저도 따라가렵니다
  • ?
    라힐렌 2013.11.26 09:40
    감사합니다.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스마일빈님께서도 충실한 새해 되시길 기원합니다.
  • ?
    dntwk 2013.11.30 09:24
    합격수기를 웃으면서 읽은 건 처음 이네요.
    라힐렌님께서는 요리에 이어 글 재주도 있으신 듯 해요ㅎㅎ.
    재치있는 합격 수기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정말...마음을 다해 쓰다듬어 드립니다ㅎㅎ.
    그동안 고생하셨고 애쓰셨습니다.
  • ?
    라힐렌 2013.11.30 13:50
    쓰다듬, 감사드립니다.
    근데 제가 요리를 한다는 정보는 어디서 얻으셨는지... 덜덜덜;;;
    역시 인터넷은 좁은 건가요...하하;;
  • ?
    dntwk 2013.11.30 14:27
    인강과 제마 이외엔 인터넷 안한답니다.ㅠㅠ
    라힐렌님 합격수기 글 대목(세 번째 단락이욤^^)에서 고3때 영어학원비를
    요리학원에 기부하시고 한식조리기능사까지 따셨다고 한 부분에서요...ㅎㅎㅎ

    글도 맛깔스럽게 잘 쓰시고 참 다재다능하신 분이다...생각함서 읽었거든요ㅎ
    다시 한번 인고의 세월을 지혜롭게 이겨 내신 님께 박수보냅니다.ㅎㅎ
  • ?
    라힐렌 2013.11.30 15:08
    아하하... 요즘 음식 블로그질을 좀 하는지라 그걸 보시고 말씀하신 줄 알았습니다.
    한식조리기능사야 우리 나이대 사람들이 조금만 공부하고 조금만 연습하면 충분히 딸 수 있는 교양자격증입니다.
    그거 가지고 그렇게 말씀을 해 주시니 부끄럽네요. *-_-*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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